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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기적의 도서관

신비가 너에게 말 걸어 오리라

1.우상- 무한으로 가는 다리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숲속에 사는 사자가 만나는 동물마다 자신이 숲의 왕인지 아닌지 묻고 있었다.

그는 곰에게 물었다. 곰이 대답했다.

"분명 당신이 왕입니다"

사자는 표범에게 물었다. 표범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네, 사자 당신이 왕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자는 코끼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코끼리는 즉시 코로 사자의

몸통을 감아 아주 멀리 내동댕이쳤다.

공중을 날아가면서 사자는 코끼리에게 외쳤다.

"오, 위대한 존재여, 나를 이렇게 멀리 던져버릴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대답을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말하면 됐을 텐데. 그럼 내가 알아서 갔을 것을!'

그러나 사자를 들어내던질 만큼 힘이 센 코끼리는 어떤 대답도 할 필요가 없다.

누가 왕인지 말할 필요가 없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진정 숭배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는 아무 대답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의 삶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의 눈, 그가 앉고 서는

방식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숭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그러면서

여전히 숭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우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데 대해 책임이 있다.

그들은 진정한 숭배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상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남아 있다.

내가 그대에게 숭배에 대해 말한 것은, 우상이 완전한 내적 변형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이해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상은 단지 구실이다.

우상은 외투를 걸기 위해 벽에 박아놓은 못과 같다. 못의 목적은 단지 그 위에 외투를

거는 것이다. 못이 없었다면 외투를 문이나 의자에 걸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딘가에

걸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옷을 걸고 나면 그대는 못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못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우상은 바로 못이다. 그리고 우상의 진짜 목적은 숭배이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는 동안 그대는 우상만 본다. 외투를 보지 않는다.

오직 못만 본다. 그대는 못이 벽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왜 이대로 놔두지?'하고

생각한다. 그대는 숭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오직 우상만 남아 있다.

그것도 완전히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이제 우상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우상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숭배의 생명력뿐이다.

그것이 내가 숭배에 대해 그대에게 말하는 이유이다.

2. 점성학 - 우주는 살아 있는 한 몸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을 때, 마하비라는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현재이고,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 미래라고 말하고 있다.

피어나는 꽃봉오리는 어딘가에서 이미 피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피어날 것이고 그것은 꽃이 될 것이다.

바로 지금 그 꽃봉오리는 꽃을 피우는 과정에 있다. 지금 그것은 단지 꽃봉오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꽃을 피우는 과정에 있다면 그것은 꽃을 피울 것이다.

그 꽃이 피어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이미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조금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시각에서 본다.

꽃봉오리는 꽃을 피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일반적으로 과거지향적이고

과거에 묶여 있다.

우리는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있고 꽃이 되고 있고 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그대를 뒤에서 민다면 그대는 앞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누군가가 그대를 앞에서 잡아끄는 것일 수도 있다.

움직임은 양방향에서 작용할수 있다. 나는 그대를 뒤에서 밀고 있고 그대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니면 누군가가 그대를 앞에서 끌고 있고 아무도 뒤에서 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역시 그대는 앞으로 움직일 것이다.

점성학은 과거가 자극을 주고 그 결과 미래가 일어난다는 시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전체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현상을 본다면, 과거는 자극을 제공하지만 미래

역시 끌어당기고 있음을 볼 것이다. 꽃봉오리가 꽃이 되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전체가 아니다. 꽃은 봉오리에게 꽃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뒤에 있고

미래는 앞에 있다. 지금 이 순간 꽃봉오리가 있다.

따라서 과거는 꽃봉오리가 꽃이 되도록 밀어주고, 미래는 꽃이 되라고 꽃봉오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양방향의 압력 속에서 꽃봉오리는 꽃이 될 것이다.

미래가 없다면 과거는 홀로 꽃을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는 꽃봉오리가 꽃이 되도록 공간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어떤 장소가 필요하다.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다.

미래가 공간을 제공할 때에만 꽃봉오리는 꽃이 될 수 있다.

미래가 없다면 과거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즉 과거가 그대를 아무리 세게 민다 해도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내가 뒤에서 얼마나 세게 밀든 상관없이 그대 앞에 벽이

있다면 난 그대를 앞으로 가게 할 수 없다. 앞으로 움직이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하다.

내가 그대를 밀고, 공간이 앞에서 "어서 나에게 오세요"하며 그대를 받아들 때,

오직 그때에만 내가 미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내가 밀기 위해선 미래라는 공간이 필요하다. 과거는 그 일을 하고 미래는 공간을 준다.

과거의 시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불충분하며 부분적으로만 과학적이라는 것이

점성학의 견해이다. 미래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있고 언제나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시각의 약점이고 우리의 근시안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게 멀리 볼 수 없다.

미래의 일들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없다.

도서명 : 신비가 너에게 말을 걸어 오리라

지은이: 오쇼 라즈니쉬

읽게 된 동기 : 오쇼의 책(그가 강의 한 내용을 담고 있다)을 읽고 싶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경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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